연갈색 긴 머리를 묶어올리고 깃털 모양 장식을 단 학생이 양팔 가득 책더미를 들고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키가 큰 사서가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학생이 책더미를 책상에 털썩 내려놓자 먼지구름이 피어오른다. 푸른 머리의 사서는 익숙하다는 듯 오래된 책들의 바코드를 하나씩 찍는다. 대부분 역사책이다. 교양서 수준의 책과 논문집이 뒤섞여 ...
일행은 동이 트기 전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선다. 안내인 아저씨는 자다가 눌린 머리털 위에 털모자를 덮고는 행낭을 들쳐멘다. 일행이 자갈밭을 지나는 발소리가 새벽의 고요함을 흐트러뜨린다. 거리 양옆으로는 엉성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이미 일어난 사람도 제법 있는지 굴뚝에 연기가 오르는 집도 많다. 요새 북문에 다가서자 경비병들이 일행을 응시한다. [아직 통...
황량하고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자 넓은 분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 중심부에 요새가 자리잡고 있다. 이토록 멀리서 봐도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미끄러운 비탈길을 내려가니 거기서부턴 땅이 온통 진흙탕이다. 요새까지는 한없이 멀어만 보인다. 어색하게 겅중거리며 진창을 나아가는 일행. 그들의 좌우로 전쟁의 흔적이 수없이 지나간다. 아직도 갑옷을 입...
덱스가 불을 피우고, 구포는 가느다란 나뭇가지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는 따온 버섯을 꿰어 모닥불에 굽는다. 버섯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꽤나 익었을 무렵 소래는 짐에서 소금통을 꺼내 넓다란 나뭇잎 위에 덜어놓는다. 버섯 구이를 소금에 찍어 먹다보니 어느덧 해가 진다. [우리 쫓아오는 그 자식 말이야.] 덱스가 입을 열자 구포와 소래가 바라본다. [아무래도 ...
마을은 이미 어수선하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종을 치고, 아이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여럿이서 누군가를 부축해 온다. 배 부분에 심한 상처를 입어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다. 촌장과 주민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어보니 부상당한 채로 마을 입구에 도착해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수인의 습격을 알렸다고. 촌장과 하누는 목책을 지나 달려나간다. ...
간밤의 소동을 뒤로 하고 혹시라도 남은 흔적이 없을까 찾으며 한나절을 보낸다. 별다른 목적지도 없이 이동하다 보니 사람이 사는 듯한 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서 봐도 흙벽과 목책을 세워 방비를 갖춘 어엿한 거주지다. 주민들에게 정보라도 수집할까 해서 흙길을 따라 접근하는데, 마을이 소란스러워진다. 경종이 울리더니 창과 곤봉 따위를 든 사람들이 뛰쳐나와서...
이 땅에도 원래는 누군가 살며 밭을 일구었을 테지만 지금은 잿더미일 뿐이다. 사방이 탁 트여있지만 다른 살아있는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일행 앞에서 꿈틀대는 그것만 빼면. 아무리 봐도 산 사람은 아니다. 변색된 피부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고, 눈알은 썩어문드러졌다. 빠지다 만 머리카락은 흙투성이에 옷은 넝마 조각과 다름없다. 그러나 어째선지 멀쩡히 ...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가 밤의 어둠을 가른다. 빗소리에 기척을 숨기고 세 사람이 모여든다. 서로가 올 것을 예상한 듯, 놀라거나 경계하지 않고 저편의 희미한 불빛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골목 깊이 자리한 폐가의 문가에 걸린 등불. 사람은 살지 않지만 약속 장소는 여기가 맞다는 신호 같기도 하다. 세 사람은 한명씩 문짝이 떨어져나간 대문을 통과해 집 안으로 ...
이승에 흐르는 삼도천 정도로 여겨지는 그 강은 사실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이다. 재앙이 일어나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된 땅과의 경계로 삼기 위해 물길을 파서 근처의 강물을 끌어왔다. 세월이 흘러 강변엔 풀이 자라고 짐승도 찾아왔지만 인적은 드물다. 강 건너편, 산이 무너진 땅으로 가려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냥꾼, 부랑자, 죄인, 혹은 죄인을 쫓는 사람. 흙에...
#1 전나무 숲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여덟 사람이 숲 속을 나아간다. 사냥꾼과 용병, 짐꾼 등이다. 사냥개 네 마리가 일행을 따른다. 땅에는 이미 발목까지 눈이 쌓인 데다 지형의 굴곡이 심하여 걷기 불편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가 멈추질 않으니 곤란한 노릇. 해가 지기 전에 야영할 만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숲에서 얼어죽을 수는 없으니까. “이 ...
#1 해는 떨어졌는데 이미 허벅지에 이르도록 눈이 쌓였다. 옥련은 얼어죽기 전에 사람 사는 집을 찾아 살았다고 생각한다. 오두막 문을 두드렸는데 한참 조용하더니, 다시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어올리자 슬쩍 열린다. 수척한 얼굴이 반만 나와서 밖을 노려본다.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군. 어쩌다 왔소?] 억양은 낯설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다. [고드름 광산에 일하...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전쟁은 쌍둥이를 쫓아왔다. 밤에도 지평선은 붉게 물들었고, 자나깨나 폭음이 들려왔다. 무수히 많은 피난민을 지나치면서 친구들과도 모두 헤어져야 했다. 그러다 길들이 끊어지는 땅끝에 닿았다. 더 갈 곳이 없었다. 전쟁을 피하려면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국경지대를 건너야 했다. 도화는 길도 닦여있지 않은 국경지대를 가로지르는 데 회의적이...
그렇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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